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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은 조선초 사회의 이단아였나? └ 사극관련들




김시습하면 금오신화, 금오신화하면 김시습..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아니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썼다고 학창시절 수험용으로 외운 분.. 그런데, 그분하면 예전 KBS 정통사극 '왕과비'에서 세조시절 단종의 폐위와 사육신 처형에 비분강개하며 이런 더러운~~ 세상을 외치시며 세상을 주유천하 한분.. 난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그가 후세에 남긴 불후의 명작 '금오신화'를 펭귄클래식 완역판으로 읽어 보고 있는데.. 작품 해설에 소개된 그의 이력과 생애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종 10년인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 사저의 하급 무반 가문에서 태어났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일세를 풍미한 명문장가답게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깨치고, 세 살 되던해에 시를 지었으며, 다섯 살에는 이웃에 살던 수찬 이계전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웠는데, 이계전의 문하에 들어갔다는 것은 곧 당대의 최고 학맥과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의 소문을 들은 세종이 직접 불러 시험을 하고는 감탄해 상을 내리기도 했다. 1449년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삼년상을 치르고 조계산 송광사에 머물면서, 거기에 석장(錫杖)을 쉬고 있던 준상인에게 불법(佛法)을 배웠다. 인간사에 관한 의문이 많았을 시기였기에 불교 교리를 깊이 받아들였고, 훗날 준상인에게 주는 시를 무려 20수나 연작하였다.

1453년 과거에 낙방하고 삼각산 중흥사로 공부를 하러갔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전해 듣고는 책을 불사르고 방랑길에 올랐다. 또 1456년 6월에 성삼문등 많은 신하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형을 당하고, 그 시신들이 저잣거리에 널브러져 있었으나 아무도 수습할 엄두를 못 내던 와중에 김시습이 그것들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는 기록이 『연려신기술』에 남아있다.

당시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터지자 유교적 이상이 깨졌다고 보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이 있었지만 세상은 세조가 중심이 되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갔으니.. 이런 세상을 보며 그는 자신과 세상이 늘 어긋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을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번번이 몸이 세상과 어긋나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았습니다. 옛 지기들은 이미 죽고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은 아직 친하지 못합니다. 누가 저의 평소 뜻을 알아주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산수 사이에 떠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산수를 떠돌게 되며 그의 마음속에는"장부에게 늘 치욕이 있거늘, 어찌 세상을 따라 순순히 부침하리요?"(「대장부 중」)라는 저항감이 깊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상적으로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두루 섭렵한 박학한 학자였고, 시와 문장에 뛰어난 문인이었지만 그의 삶은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 즉 삶은 불우했고, 타협하지 않았기에 불후했던 것이다. 이렇게 김시습이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전국 각지를 유람하던 때의 일로 그 시기에 『탕유관서록』(1458), 『탕유관동록』(1460), 『탕유호남록』(1463)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를 썼다.

1465년 책을 싸들고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산실을 복축하고 칠 년간 머물렀는데 바로 그 무렵인 1470년 즈음에 『금오신화』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금오산실에서 육칠 년을 고민과 병마에 싸인 채 세월을 보내던 중 중앙에서 성종이 숭유문치를 표방하며 널리 인재를 구하였고, 김시습은 서울로부터 청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새 조정에서 벼슬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육경(六經)을 다시 익혔다.

그러다 1483년 폐비 윤씨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하자 승려 차림을 하고 관동으로 떠나 산수를 돌아다니며 글을 짓는 생활을 다시 하게 된다. 결국, 오십 세 이후 강원도 양양에서 쓴 시 「나의 삶(我生)」을 통해서 김시습은 이상주의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표할 적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다면
나의 마음 잘 이해햇다 할 것이니  품은 뜻을 천년 뒤에 알아주리

그리고, 1493년 무량사에서 판각 간행한 『묘범연화경』의 발문을 쓴 뒤 '췌세옹 김열경(贅世翁 金悅卿)'이라 서명하고는 며칠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는 유언대로 절 근처에 매장되었고, 1782년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영월의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덧글

  • 아롱쿠스 2010/02/23 09:09 # 답글

    이분은 '왕과비'엔 안나오시고, '한명회'에 등장합니다.
  • 엠엘강호 2010/02/23 12:40 #

    아.. 그랬나요.. '한명회'라면 이덕화가 한명회역을 했던 사극이죠.. 거기서 김시습이 나왔었나.. 암튼, 남루한 모습으로 저잣거리에서 누굴 만나 대갈일성하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ㅎ
  • 박이반 2010/02/23 10:03 # 삭제 답글

    이야... 뭍어주는 대목에서 감탄을.. 대인배군요
  • 엠엘강호 2010/02/23 12:45 #

    확실히 단종 폐위와 사육신 처형등 반기를 들며 당시 세조를 깐 대인배죠..
    반동으로 몰려 안 죽은게 신기할 정도인데.. 뭐.. 이미 알고 주유천하 했을지도 모르죠..ㅎ
  • 일국지 2010/02/26 08:56 # 삭제 답글


    야사에 의하면 김시습이 계유정난의 충격에 세상사의 모든 미련을 잃고 똥통에 들어가 미친듯이 웃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세조의 계유정난은 조선시대 전반에 있어 큰 재앙이었던 것이 이이화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충신의 시대가 가고 간신의 시대가 왔다"는 거겠지요.

    아무래도 멀쩡한 성군(세종)의 손자를 쳐냈기에 세조는 정통성이 취약했고 결과 부패하고 모략에 능한 권신들의 전횡을 용납하고 심지어 그들과 공적-사적인 의리를 강조하면서 조선 왕실의 부패와 타락을 조장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건 이때 어느 신하가 세조를 한고조 유방에 비유하며 아부하자 세조가 버럭 성질을 내며 저놈을 옥에 가두라고 했는데 이유는 "그럼 내가 한고조 유방처럼 옛 동지들을 쳐죽이는 비열한 놈이란 거냐!" 이렇게 역정을 냈다죠.

    그런데 이렇게까지 의리를 강조했던 분이 막판에 모 반란 사건에 신숙주와 한명회가 연루되어 있다는 반란군의 루머를 믿고 그들을 투옥하는 짓을 저질렀으니 속으로 얼마나 속을 썩였을지, 알 만하지 않을까요?

  • 엠엘강호 2010/02/26 10:13 #

    그만큼 김시습이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지인들이 다 그렇게 죽어나갔으니 말이죠.. 그 유명한 계유년에 벌어진 군사쿠데타 계유정난.. 황보인, 김종서 일당을 처치하고 이어진 단종의 폐위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 세조.. <왕과 비>라는 불세출의 사극에 보면 아주 리얼하게 묘사가 되어 있죠.. 어느 책에서도 보면 세조때부터가 강력한 왕권 강화의 시작으로 보는데.. 그만큼 세조의 명분이 쿠데타로 잡은 정권인지라 이후에도 반란 세력등 도모를 그냥 두지 않았으니 바로 단종 복위를 꽤한 사육신들 처단이 바로 그것이고.. 중간에 말씀처럼 자신의 좌우 참모들 신숙주와 한명회까지 반란 연루때문에 옥고를 치른 전례가 분명히 있었고요..

    암튼, 세조는 정적 제거에는 일가견이 있지 않았나 싶네요.. 마지막 죽을때도 환영에 시달리며 단종이 그렇게 "수양숙부.. 수양숙부"하며 얼마나 따랐는데 그런 조카를 그렇게 죽이면 안되었으니.. 생육신의 대표주자 김시습의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에이 더러운 세상..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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