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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9년 '이몽학의 난' └ 사극관련들



위 사진은 4월에 개봉해 나름 히트친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하 구버달)에서 '이몽학'역을 맡은 차승원의 모습이다. 물론, 영화로도 접했지만 어느때 부터인가.. 차승원은 현대물보다는 이번에 개봉한 '포화 속으로'의 유격대장 모습이나 저런 엣지있는 선비의 모습등 '시대극'에 잘 어울려 보이는게 나만의 생각일까.. 그가 바로 세상을 향해 분노의 칼을 든 이몽학이었으니.. 연출의 힘인지 그림이 아주 잘 빠지게 나온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영화를 볼때 그가 분연한 이몽학이 실존 인물인줄 몰랐다. 그와 함께 전설의 맹인 검객으로 나온 '황정학'도 말이다. 댕기머리 총각 '견자'만 허구의 인물일뿐.. 이몽학과 황정학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특히 황정학은 전설의 맹인 검객으로 나오지만 그는 '사암침'이라는 아주 독특하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침을 개발한 침술의 대가로 알려져 있고, 그중 몇 권의 침술책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극중에서 황정학을 분연한 황정민 또한 그 모습에 제격으로 나왔으니.. 이 둘의 대결을 그린 영화가 바로 '구버달'이다. 아무튼, 각설하고.............

그렇다면 이몽학(李夢鶴, ? ~ 1596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생몰년대신 1598년(선조 29년)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영화상에서는 그의 난을 그리기전에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먼저 보여준다. 즉,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기 전 1589년 대동계를 이끌던 그가 돌연 자살하면서 소문이 흉흉해지고, 급기야 그의 모가지는 다시 부관참시를 당한다. 이렇게 임팩트있게 당시 조선 사회를 뒤집으려던 그의 꿈은 사라졌는데, 그런 대동계의 바톤을 이으며 급부상한 인물이 '이몽학'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상의 설정일 수도 있으니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이몽학은 어떤 인물이고, 그의 난은 어떻게 일어나서 어떻게 평정이 됐는지 위키백과의 내용을 인용해서 정리해 보면 이렇다. 먼저, 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은 1596년 임진왜란 뒤 정유재란 전 이몽학이 불만에 찬 농민들을 선동하여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으로 대표되는 설명이다.

이몽학은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홍산현 구룡 사람이다.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녔다. 임진왜란 때 한현의 부하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반란 계획을 꾸민 다음, 의병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동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으로 불리는 반난을 일으켜 한때는 홍산·청양·대흥 등을 차례로 함락시켜 홍주(지금의 홍성)까지 돌입했으나, 반란군 중에서 관군에 붙은 자가 많아져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그러자 그의 부하 김경창·임억명 등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항복하였다.



* 배경

그 당시 농민들은 임진왜란 등으로 몹시 가난해져 있었다. 이때 본래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이 되었다.(이몽학은 전주 이씨로서 서얼이긴 서얼이었지만 조선 왕족의 피가 그 몸에 흐르고 있었다.) 한현은 관원으로 충남전역을 다니며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전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감시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몽학 뿐만 아니라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1596년(선조 29) 한현은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 부여) 무량사에서 이몽학과 만나 역모를 모의하고 도천사(道泉寺)의 승려들과 인근 가난한 농민 6~7백 명을 규합했다.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김경창, 임억명, 이구, 장준재, 사노, 김팽종, 승려 능운을 거느리고 자신이 선봉장이 되었다.

* 반란 초기

수년을 끈 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데다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극도로 흉악해진 때이므로 “왜적의 침입을 바로 잡겠다”는 반도들의 선동이 크게 호응을 얻었다. 1596년 음력 7월 6일 이몽학군은 홍산현에 쳐들어가 현감 윤영현을 홍산동헌에서 생포하였다. 임천군으로 쳐들어가서는 군수 박진국을 포박했다. 이어 7일에 정산현을 함락시켰다. 전산현감 정천경은 도주했다. 8일에 청양을, 9일에 대흥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농민들까지 합세해 반란군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이몽학군은 10일에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관속 이희수를 시켜 거짓 항복을 함으로써 이몽학을 속이고 시간을 지체하였다. 이 틈을 이용해 홍가신은 인근 수령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任得義)와 더불어 성을 지켰으며, 인근의 순찰사 신경행, 최호, 박동선, 황응선 등이 와서 홍주성에서 이몽학군과 전투를 벌였다.

* 반란 진압

그 사이 도원수 권율, 충청병사 이시언, 장군 이간 등이 홍주 주위로 향했다. 이때 홍가신은 민병을 동원하여 반격하였고, 판관아병 윤계가 총포를 쏘면 이몽학군 모두 살아남지 못하고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오면 큰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또한 홍주에 살던 무장 임득의, 박명현, 전 병사 신경행 등은 홍주성에 들어가 홍가신을 도왔다. 남포현감 박동선도 충청수사 최호와 상의한 후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였다.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반란군은 밤에 청양까지 도망하였고,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 임억명(林億明), 태척 등이 이몽학을 살해하고 머리를 베었고, 이몽학이 죽자 이몽학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면천(沔川)에서 형세를 살피고 움직이지 않던 모속관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 명을 모병하여 이몽학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하다 잡혔다. 한현을 비롯한 이 난에 가담한 자들 중 죄가 무거운 자 100여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중에 따라 처벌되니 이로써 이몽학의 난은 평정되었다. 1604년(선조 37) 논공을 할 때 이몽학을 죽인 김경창·임억명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淸難一等功臣),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 신경행과 임득의는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 의병장들의 누명

한현의 친국 과정에서 의병장 김덕령과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 고언백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이 잡혀갔다. 이몽학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킬 때 “김덕령은 나와 약속하였고 도원수와 병사ㆍ수사도 모두 함께 계획하였으므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선전했고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므로 난이 평정되어 선조가 친국을 할 때에 이들의 죄를 물었다. 그 뒤 홍계남과 곽재우는 풀려났으나 김덕령은 선조의 친국 과정에서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사망하였고 최담령은 결국 처형되었다.

* 선조의 정권에 끼친 영향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선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 등 공훈이 많은 관군 장수들 역시 의심하며 경계하였다. 이 덕에 본의 아니게 원균이 선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우대한 것이다.

출처 : 위키백과 -이몽학의 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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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일국지 2010/06/21 16:19 # 답글


    영화에선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민폐 그 자체인 인물이었죠.

    솔직히 말해 한 시대를 선도할 만한 그릇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백성들을 이끌었던 명분이 "왜적 타도" 그리고 "의병장들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순전히 거짓말들 뿐이었거든요.

    실제로 사기가 급격하게 기우는 계기도 모년모일 어디서 의병장 누구누구와 합류하기로 했는데 합류하지 않자 사람들이 이몽학의 거짓말을 눈치챈 것에 기인합니다.


    일단 서얼 출신이라 나름 조선 사회에 대한 불만은 많았던 것 같은데 너무 앞서 나간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의병장도 그렇고 백성들도 그렇고. 선조가 아무리 무능한 군주라도 단지 왕이란 이유만으로 충성을 바친 유교 사회였던걸요.

    저분의 구라덕에 의병장들은 이후 "왕의 칼"에 시달려야만 했고... 뭐 그런 겁니다.
  • 엠엘강호 2010/06/21 19:10 #

    음... 먼저, 영화에서는 '이몽학'을 거의 주인공으로 몰고 갑니다. 그의 체제 반란이 주 목표가 되죠.. 견자와 황처사는 그에게 도전하는 자들이고, 처음 이몽학도 대동계를 이끌며 "왜적타도"에서 체제전복으로 나갔죠.. 그런데, 말씀처럼 저 위키에 있는 것처럼.. 이몽학이 무리수를 많이 둔 느낌이네요.. 그릇을 떠나 그렇게 의병장들을 끌어들이며 사기를 친다면 말이죠.. 왕족의 서얼 출신에 이씨 조선에 대한 자부심?의 욕망이 비뚤러 나간게 아닌가 싶네요..

    하지만 선조에게는 어느 정도 정신적 피해를 입혔으니.. 그렇다고 의심하며 의병장들을 괴롭힌 선조는 사실 할 말 없다는.. 뭐.. 이순신 장군도 피해자니 말이죠.. 아무튼, 이몽학의 난은 정여립처럼 임팩트가 있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왜란의 난리통에 시세의 흐름을 잡고자 다소 몸부림을 쳤던 그런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욕망의 칼날 몸부림이 비켜갔지만서도.......
  • 선조라.. 2010/08/23 22:35 # 삭제 답글

    개인적으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최악의 왕으로 꼽는 선조이기 때문에,

    망조가 들어 이미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서 간신히 유지하는 왕국을, 그리고 가장 무능력한 왕을

    전쟁으로 연명하게 해준 일본이 더 원망스럽네요.

    더 아쉬운건 그토록 무능력한 선조가 종전후에 친정을 하고

    천수를 다 누렸다는거...
  • 엠엘강호 2010/08/23 22:59 #

    뭐.. 다들 알다시피.. 조선왕조 최악의 군주로는 '인조'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선조는 임진왜란을 격은 전란에 기사회생한 느낌이랄까.. 그것은 일본이 연명하게 해준 것보다는 당시 상황이 그렇다는 거죠.. 여기 정여립이나 이몽학의 반란등에 당쟁의 점화로 내치도 복잡했고요.. 또한 치고 올라오는 아들 광해군마저 그렇게 버릴려고 했으니.. 여튼, 선조는 영조 다음으로 조선왕조에서 40년간 정권을 잡으며 나름 길게 갔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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