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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대중언론 괘서(掛書)가 있었다. └ 사극관련들

지금 강호가 읽고 있는 책이 있다. 바로 어느 KBS 기자의 고해성사같은 책 <9시의 거짓말>..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책은 우리시대 언론을 제대로 까발리고 파헤치며 진실과 사실을 왜곡해온 신문, 방송에 대한 가열찬 비판의 날을 세운 책이다. 읽을수록 그 통렬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더군다나 이 책은 이런 비평과 비판에 대해서 가치투자의 대가 '워렌 버핏'과 대비시켜 조목조목 반박하며 설명해주고 있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책 리뷰때 언급하기로 하고, 그런데 이렇게 언론이 지배하고 조정과 조율을 하는 현대사회에서 과연 옛날에도 이런 언론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즉, 민중들과 백성들의 목소리가 과연 조정까지 전달이 되는 어떤 언로(言路)가 있었는지 아니면 조정과 백성들 사이의 언로가 있었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봤다. 물론, 대표적으로 얼핏 떠오르는게 억울함을 구제하는 국가 공식제도였던 '신문고'가 있었지만 이것이 어떻게 운영되고 시행되었는지 자세히 밝혀진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신문고'를 언론 활동이라고 보기는 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애 '괘서(掛書)'는 달랐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민중언론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괘서(掛書)? 과연 어떤 언로였는지 한번 알아보자. 먼저, 이름부터 무언가 '괴상한 글'이라는 느낌부터 오는 이 괘서는 마치 1980년대 대학가를 떠돌며 독재정권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민주화 운동을 알리는 거의 유일한 대중언론이었던 '대자보'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 대자보는 1960년대 말 중국에서 문화혁명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홍위병을 통해 종이에다 큰 글자로 4대 원로의 잘못을 고발하게끔 한 데서 유래가 된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대자보는 다른 언론인 신문, 잡지, 방송 등의 매체가 어떻든지 표현 주체가 드러나는 반면에, 대자보는 바로 '익명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대단히 효과적이고 비밀스러운 대중선동 방법의 일환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은 인지된 사실이다. 누구든 써붙일 수 있었기에 일단 대자보가 붙으면 소문은 불길처럼 번져나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여론 형성데 지대한 공을 한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군사정권 시절 언로가 막힌 사람들에 의해 마지막 언로로써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묵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대자보와 비슷한 민중언론이 바로 조선시대에 있었으니 바로 위에서도 언급한 괘서(掛書)라고 부르는 것인데, 민심이 흉흉할 때는 어김없이 등장했다고 한다. 발표자의 이름을 숨긴다는 점,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포악한 관원을 비난하는 내용이라는 점, 관리들이나 포졸들에 의해 발견 즉시 떼어졌다는 점등은 1980년대의 대자보의 형태와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괘서에는 누명을 씌우는 무고가 많았고, 권력투쟁을 위해 악용되는 경우도 잦았다고 하니 그 폐단도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좀더 살펴보면은.. 괘서는 주로 한문으로 된 것이 많았지만 한글 괘서도 차츰 많아지게 된다.

한글 괘서는 1449년에 처음 나타났는데, 1445년에 한글 최초의 문학작품인 <용비어천가> 완성되고, <훈민정음>을 펴낸 것이 1446년이니까 채 3년도 안되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훈민정음의 뜻이 금방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한글 괘서는 주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수령들을 고발하는 데 이용되었고, 간혹 신분을 숨기기 위해 양반들이 일부러 한글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괘서를 둘러싼 사건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 괘서사건은 1547년(명종 2년)에 일어난 '양재역 괘서사건'이다.

부제학 정언각이 선전관 이노와 함께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느라 남쪽으로 갔다가 전라도 양재역에서 붉은 글씨로 붙어 있는 괘서를 보고 가져와 임금에게 바쳤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그믐날."  이 괘서의 내막을 좀더 살펴모면은.. 여기서 여주는 바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가리킨 것이다.('여인천하'사극에서 전인화 氏가 맡은역을 생각하면 쉽다?) 즉, 중종의 제1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첫 아들 인종을 낳고, 제2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둘째 아들 명종을 낳았는데, 중종이 죽은 후 인종이 즉위하지만 병약해 즉위한지 1년도 못돼 죽은 것은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지만 불과 12살의 어린 나이였고 그래서 잘 알다싶이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는 국정을 농단하며 정치를 좌지우지 하게 된다. 바로 자신의 동생(오빠)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잡고서 명종1년(1545년)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소윤 윤원형 일파가 대윤 윤임 일파를 몰아내며 반대파들을 숙청한 것이다. 그기고 저기 괘서에 언급된 '이기'라는 자는 당시 병조판서로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범으로 이 괘서는 당시의 이런 상활을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윤원형 일파는 이 것을 오히려 기회로 이용했다. 이런 괘서가 나도는 것은 아직도 불온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며, 을사사화 때 미처 쫓아내거나 죽이지 못한 반대파까지 모조리 숙청해버린 것이다.(정미사화丁未士禍, 일명 벽서(壁書)의 옥(獄)이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윤원형과 이기를 이흉이라 했고, 괘서를 가져온 정언각과 정순봉, 임백령 등을 합쳐 삼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그 유명했던 양재역 괘서사건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악용돼 피의 숙청을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몇 년 후 대도 임꺽정 사건이 일어나면서 민심은 흉흉해지고 괘서는 더욱더 남발되며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괘서는 조선 중기 이후 더 자주 나타나면서 그만큼 국정이 혼란했다는 반증인 셈이다. 그러자 조선의 조정은 급기야 법으로 괘서를 엄격히 금지하게 되었고, 괘서를 쓴 자는 발각되면 목 졸라 죽이는 교형에 처했고, 괘서를 본 사람은 즉시 소각해야 했고, 소각하지 않고 관가에 내놓으면 곤장 80대를 맞았고, 또 관리가 이를 수리하면 곤장 1백대를 맞았다고 한다.

특히 조선 후기 영조시대 때는 괘서사건이 날로 빈번해지자 괘서를 쓴 범인을 잡으면 2품 벼슬과 천금을 내리겠다고 고시하기도 했다니.. 그만큼 괘서가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는 주범으로서 조정에서는 골칫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괘서는 사라지지 않고 한말까지 계속되면서 한편으로는 민중언론의 역할을 하면서도 이렇게 위의 사례처럼 정치적 음모의 소재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괘서의 논란은 조선사회의 화두였던 셈이다. 하지만 민중언론이 없던 조선시대의 유일한 민중의 언로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조선시대의 '괘서'를 살펴보면서.. 그것이 작금의 시대에 '대자보'를 통해서 정권을 비판하고 민주화를 외쳤던 그 흐름이 이제는 언론과 방송의 장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모돼 또 다른 이 시대의 '괘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여기 <9시의 거짓말> 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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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초효 2010/09/27 11:04 # 답글

    언론과 방송 뿐일까요. 이글루만 봐도 궤서를 넘어 괴서 수준의 글들이 꽤 많습니다만.(특히 뉴스비평란에 말이죠.)
  • 엠엘강호 2010/09/27 17:20 #

    그러게요.. 작금의 시대에는 당시의 '괘서'를 능가하는 '괴서'가 넘쳐난다는 거죠..
    소위 언론은 물론 우리들의 넷질도 말이죠..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
  • 2010/09/27 12: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엠엘강호 2010/09/27 17:17 #

    네.. 먼저 오랜만이시네요.. 물론, 신문고에 대한 그런 언급과 이야기는 많은 것으로 압니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운영되고 언론활동에 대해서는 제가 포스팅을 위해서 본 책에서는 좀 회의적이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말씀처럼 해당 자료를 검색만 해봐도 많이 나오겠죠..

    그리고, 괘서의 경우는 말씀처럼 그렇게 주로 백성들의 여론이전에 반대로 여론 조작의 악용으로 이용하는 수단이 많았으리라 봅니다. 여기서도 예를 들었듯이 말이죠.. 조광조와 관련된 '주초위왕'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겠군요.. 영조때는 당연 선대왕 경종의 독살에 대한 괘서가 난립하는등.. 영조 자신도 그래서 더욱더 엄벌히 처단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런데, 임금님 면전앞에서 그런 용자도 있었군요.. 여튼, 괘서.. 분명한 것은 지금은 많이 없어진 '대자보'의 원전이라 보면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
  • 전직 환빠 Jes 2010/09/27 17:20 # 답글

    정언각은 정미사화(양재역 벽서 사건) 이후에 낙마했다가 말에게 밟혀 죽어 그 말은 무려 "의마義馬"라는 칭호를 얻게 되지요.
  • 엠엘강호 2010/09/27 17:49 #

    그래요.. 그렇다면 정작 주인 정언각보다 말이 칭송을 받았으니.. 음.. '인과응보'라 봐야겠군요..
    그 많은 선비들을 죽였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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