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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과 당현종 그리고 막장 주온과 사성 이욱 ☞ 중국역사물

이세민에 이어 무측천(武則天)은 '소인배를 잘 다룬 대담한 여황제' 명제를 내리며 이세민의 재인으로 선발돼 입궁하면서.. 태종 사후 비구니로 들어갔다가 아들 고종이 즉위하자 다시 들어와.. 이치의 비로 시작된 그녀의 궁중생활부터 권력을 잡고 누린 41년간 통치를 하게된다. 하지만, 권력광이었던 그녀는 고종에 의해서 소의가 되고 소의에서 황후가 되자 황제 자리까지 노리며 왕조까지 바꾸기 위해서.. 자기 주위의 현명한 군자들보다 소인배들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주무르고 내치며 그녀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대주를 만들고 나중에 호랑이 등에서 내려올때는 다시 당의 이씨들에게 권력을 돌려준 여걸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다.

즉, 동서고금을 통해서 소인을 다루는 솜씨는 무측천이 제일이었고.. 이런거 그녀 스스로가 소인으로서 소인다운 행각을 수없이 벌이며 소인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즉, 소인을 이용했지만 소인에게 통제당하지 않은 군자와 소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그녀의 정치적 감각을 높이 평가한 내용으로 저자는 말한다.. "전례가 없는 여황제.. 비뚤어진 재주로 40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네.. 소인을 손바닥에 놓고 희롱한 사람.. 천추에 무측천뿐이라네.."

이어 이융기.. 처음에 이융기(李隆基)가 누군가했다.. 바로 그 유명한 양귀비와 거시한 관계로 잘 알려진 당현종이다. 그는 당왕조 6대 황제로 이세민, 무측천과 함께 당왕조의 세명의 걸출한 인물로 꼽고 있다. 특히 그는 43년 황제로 있는 동안 앞에 20여년은 '개원의 치'로 대변되며 유능하고 능력있던 군주였고.. 후의 20년은 '천보의 난'이라 부르며 방탕하고 음탕한, 형평없는 황제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귀비 애기가 나오면서 '양귀비를 죽인 냉혹한 카사노바'로 명제를 내리며 그를 파멸로 몰고 갔다는 것인데.. 실은 양귀비와의 그런 관계보다는 그는 여색광이었기에 양귀비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융기가 휘하 장수 양아들로 거둬들인 안록산이란 막장 장수를 키우며 자멸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성군에서 혼군으로 뒤바뀌버린 결정적인 사건 바로 '안산의 난(755년)'으로 안록산과 양귀비 사촌오빠 양국충과의 권력다툼속에서.. 당시 71세 이융기는 도망치다가 다른 군벌들의 득세로 난이 평정되고 압력에 못이겨 양귀바마저 목 졸라 죽이게 된다.

그는 이렇게 측천무와 달리 군벌 소인배에게 놀아난 꼴이 된것이다. 실제 이 안사의 난으로 200년이 넘는 당왕조의 후기는 대혼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양귀비는 본명이 양옥환으로 원래는 이융기의 아들 수왕의 비로 둘은 5년간 평범한 부부 생활을 했는데.. 이융기 부인 무혜비(수왕의 생모)가 죽자 혜비를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 이융기는 양옥환을 그 자리에 앉혔으니.. 아버지가 며느리를 부인으로 맞이한 꼴이 된것이다. 하지만 이때 수왕은 뭐라 말을 못했단다.. 이융기가 워낙 살인마왕이라 그 자신에게 누구도 복종하지 않으면 자식들까지 마구잡이로 죽였다니.. 눈뜨고 보고만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융기 사후 중당시대의 시인 백거이가 쓴 '장한가'에 묘사된 양옥환과 이융기의 로맨스는 이융기를 다정다감한 인물로 분칠한 장한가를 믿어서는 안되며.. 그는 냉혹하고 무정한 카사노바에 지나지 않았다 하니.. 저자는 말한다.. "세상이 가소롭게 여긴 두 얼굴의 남자.. 시비공과가 한 홈에 몰려 있네.. 앞의 공적이 어찌 뒤의 과실을 덮으랴.. 천추에 좋은 명성 지키기가 어렵구나!"

역대 사가들이 딱 다섯 글자.. 즉 '음학무인리(淫虐無人理 : 사람 같지 않은 자)라는 평가를 내린 황제가 있었으니 그가 5대사의 첫 황제이자 후량(後梁)의 태조인 주온(朱溫)이다. 바로 이시기는 앞에서 살펴본 당후기 안사의 난에서 5대10국에 이르는 150여년 혼전의 기간으로.. 이때는 이런 혼전에 참여한 군벌이 중국사에서 가장 많았고 시간도 가장 길어서 파괴도 컸다니.. 이때의 군벌들이 제멋대로 설쳐도 전혀 손 쓸수 없을 정도로.. 당 왕조 후기는 환관들이 권력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사실상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런때에 나타난 이름바 지방에 군벌들은 소황제를 칭하며 야심을 드러내는데.. 이때 주온(주전충, 주황이라고도 함)은 중국사에서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가장 잔혹한 살인마답게 무선운 군벌로 병사들을 다스릴때도 살인을 놀이처럼 즐겼다 하고.. 또한 수 많은 여자들을 욕보이고 죽였는데 만나는 여자마다 다 간음했다고 떠벌일 정도로 그는 궁정의 귀족부인, 동료, 부하의 처녀자식들까지 여지없이 욕을 보였으니..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암튼, 이런 주온이 이극용과 함께 황소의 난을 진압하고 세력을 키우며 나라를 세우니 이게 5대의 첫번째로 후량이었고.. 이때 주온은 양아들 우문을 총예하다가 이런 시기한 둘째 우규에게 간밤에 야습으로 찔러 죽었으니 그의 말로는 가정사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 우정이 즉위했지만 얼마 못가서.. 후당에 의해 간판을 내리게 된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주온을 보면서 중국의 황제 제도는 정말이지 가장 황당한 제도라고 까고 있다.. 이 황제라는 자리는 어떤 자질과 조건이 있어야 하는게 아니라.. 그냥 누구나 쫓아가 빼앗으면 그만이라면서 이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기만 하면 모두들 납작 엎드려 만세를 부르며 섬기려 든다며 비아냥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서 중 특히 기전체 역사가 가장 웃기다고 한다.

부랑자든 도적놈이든 막장이든 용좌에 단 며칠, 아니 단 몇시간이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으면 사관은 즉시 '제(帝)'니 '상(上)'이니 하는 존칭을 갖다 붙이면서 하늘과 땅에 버금가는 고금에 둘도 없는 거룩한 분이라며 공적을 칭송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주온같이 짐숭 축에도 끼지 못할 물건조차도 '황제'로 인정하여 '후량 태조'로 불러야 하니..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냐며 말한다. "틀림없는 도적을 제왕이라 부르는.. 역사서의 체제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바른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쓴다면.. 명실상부하게 흥망을 논하리라.."

이런 막장 주온과 비교되는 인물이 있으니.. 그는 바로 훗날 '사성'(詞聖)으로 불리는 남당(南唐)의 이후주(李後主 : 937~978)로 이름은 욱(煜)이고 자는 중광으로 남당 이씨 왕조의 제 3대 군주였다.. 사람이 근심이 많고 착한 인상과 소탈해서 풍류를 즐기고 시사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전형적인 문인 스타일이었다 한다. 후세에 그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망국 군주라 했지만.. 마령의 남당서에는 그는 백성을 아끼고 송에 끌려가 죽었을때도 강남 사람들이 숨어서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백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후주는 시를 창작하는 방면에서 광적인 수준이라 황제 시인이라 칭하며 황제 노릇보다 문학에 더 심취했던 이단아로 명제를 내린다. 그렇다면 왜 황제 노릇은 안했을까.. 당시 5대10국 중에서도 남당이 선두를 차지할 정도로 잘 나갔다고 하지만.. 힘이 약해 강한 송을 상대할 수 없어 이욱은 즉위하던 해부터 송의 신하로 자처하며.. 송과의 전쟁을 피하며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런 그는 결국 포로로 잡혀 송에서 죽기전까지 '낭도사', '우미인'등의 시문을 남기며.. 세상에 40여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지금도 중국 문학사에서 천추에 길이 남을 정도로 손꼽는다고 한다. 그가 황제가 아니라 진정한 문인었다면 위대한 사성으로 추앙받으며 길히 남을 거라며 저자는 말한다. "흥망성쇠야 고개를 돌려보면 허망하지만.. 후주의 시사는 마음에 남네.. 만고천추에 명작을 전하니.. 인정과 인성은 영원히 서로 통하누나!" 





덧글

  • 에드워디안 2010/04/19 23:12 # 답글

    남당(南唐)의 이경-이욱부자는 문학에선 나름 실적이 있었지만, 정치면에선 낙제점인 사람들이었죠. 이미 이경의 치세때 후주(後周)의 침공을 받아 장강 이북 즉 회남일대를 빼앗겼는데, 이게 남당입장에선 큰 타격이었죠. 그도 그럴듯이 후주에게 탈취당한 회남지방은 중국 유수의 염장이 있는 곳으로, 이걸 밑천삼은 남당이 강남일대의 패권을 장악한 건 물론 화북의 오대왕조에 대해서도 종종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서 있었는데, 이 염장을 상실하는 바람에 후주로 부터 원가 이상의 높은 돈을 주고 소금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곧 강남경제의 자립능력상실로 이어져, 정치적으로도 종속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합니다. 이렇듯 위급한 시국임에도, 이경은 문학취미에만 빠져 국사를 내팽긴 채 자주 은거생활을 한데다 간신을 총애해 남당의 국력은 쇠퇴일로를 걸었다 합니다. 그 뒤를 이은 이욱도 재위 내내 사치스러운 생활에 사(詞)를 짓는데 정신을 파는 등, 아버지처럼 국사를 방기해 국력을 갉아먹었지요. 오죽하면 한희재(韓熙載)가 남당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 보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주색에 빠지다 죽었으니... 송군(宋軍)이 수도 금릉성을 포위하고 나서야, 이욱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조광윤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오히려 호되게 면박만 당했다고 합니다(당연하지). 그렇게 나라가 망한 후 개봉으로 압송되어 거기서 죽었는데, 일설에는 송태종 조광의에게 독살당했다고도 하네요.
  • 엠엘강호 2010/04/19 23:34 #

    음.. 역시 한 나라의 군주는 자신의 하비는 나중에 하더라도 역시 정치를 잘해야 하는데 말이죠.. ㅎ 중국의 수많은 역사중에 5대 10국시절 남당의 말로는 역시 이욱이 말아먹긴 했군요.. 사성으로 칭하며 후세에 이렇게 문사적인 업적은 남겼지만.. 나라의 흥망성쇠는 그렇게 갔으니 말이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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