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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종연횡 유세가 소진과 장의 & 초회왕과 굴원 └ 열국지관련

전국시대 중반(B.C 300년대 초반)으로 들어서면서 전국칠웅이 자리를 잡으며 패권을 다투기 위해서 서로들 각축전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상앙변법을 통해서 강국으로 부상한 진나라 혜문왕이 각 제후국에 땅을 요구하며 동진을 추진해 독보적으로 나선다. 이때 귀곡선생의 수제자중 소진과 장의 두 희대의 유세가가 짠하고 등장하는데..ㅎ

먼저 소진은 자신의 유세술을 펼치기 위해서 집안의 반대와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각국을 돌아다녔는데.. 그 경로만 해도 처음엔 주나라 현왕을 알현하고 진혜문왕에게는 아버지 효공때 상앙같은 유세가의 무소불위를 봤기에 무시당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귀곡선생이 주신 '태공음부편(太公陰符篇)'을 절차탁마해 다시 유세술에 눈을 뜬다. 이에 그는 조나라 숙후를 찾아갔다 정승 봉양군에게 퇴자맞고서 다시 연나라 문공에게 의탁하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이후 조나라 숙후를 다시 찾아가 6국이 연합해서 진(秦)에 맞서야 한다는 합종책을 내놓으며 종약장으로 활약하며 각국을 돌아다니며 연합시킨다. 그때 그의 권세는 6국의 재상을 지낼만큼 주천자를 능가했다니 금의환향중에서 최고라는.. 암튼.. 이런 합종책이 진을 견제하며 빛을 보는가 했는데.. 사실, 오래 가지 못한다. 다들 난세에 동상이몽인지라.. ㅎ

이때 소진과 동문수학했던 장의도 출사해 유세술을 펼치려 위나라 혜왕을 찾아갔다가 퇴자맞고 초나라 위왕에게 의탁하다가 영윤 소양에게서 화씨벽을 훔친 주범으로 오해받아 치도곤을 맞는다. 하지만 이때 부인에게 입만은 살아서 다행이라며 안도한다..ㅎ 이후 조나라에 있던 친구 소진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을려다 문전박대 당하고.. 소진의 숨은 배려로 진(秦)혜문왕이 장의를 알아보고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으로 올라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 진가라는게 뭐.. 한마디로 애기하면 6국을 이간질시켜 띄어놓아 진나라에 붙게 하는건데.. 그래서 그는 소진이 제시한 합종책을 깨기위해서 첫번째로 위나라와 연나라를 포섭(연나라 세자와 결혼)해 받들라 꼬득이고.. 위나라에서 재상직을 하며 진나라와 겸직한다. 이때부터 합종의 6국은 와해되기 시작되고 소진은 진나라에 붙은 연나라를 책망하러 갔다가 도려 연나라 역왕에게 제나라가 우릴 침범했다며 책망받는다. 이에 소진은 연역왕의 어머니 문부인과 사통해 일부러 죄를 짓고 제나라도 출분해 가니.. 그곳에서 제선왕을 보필하며 눌러지낸다. 

이때부터 소진은 장의의 연횡책에 위기감을 느껴 위, 조, 한, 초, 연 5개국 합종을 추진해 초회왕이 맹주로 추대되어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다들 동상이몽인지라 함곡관에서 대패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제나라가 빠졌는데 그 이유가.. 선왕에 뒤를 이은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 전문의 언질로 일부러 늦게 합류해 합종 대열에서 한발자국 빼는 외교 센스를 보인다.

이로써 제나라는 안정감을 찾게 되고 제선왕 시절 잘나가던 소진의 세력은 꺽이며 제민왕이 맹상군을 더욱더 중용하니.. 합종의 실의 없음과 무용함을 들어 소진을 궁지로 내몰아 대부들이 자객을 시켜 암살시킨다. 이렇게 소진은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출분했다가 최후의 말로를 맞은 것이다.

한편 위나라 정승로 있던 장의는 육국이 진나라 치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며 반기면서.. 소진까지 죽자 더욱더 의기양양해 위애왕을 설파해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게 하고 다시 진나라로 복귀한다. 이때 연나라는 공자 자지(子之)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것을 제민왕이 평정하며 위세를 떨치자 종묘사직이 거들나버린 연나라는.. 연소왕이 권좌에 올라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여기서 악의가 등장하는 연나라 애기는 다음에..ㅎ

한편 합종이 사라진 종국에는 초, 제, 진 삼국이 강국으로 부상되며 서로 암중모색한다. 여기서 장의가 또다시 나서서 제나라와 두터운 친교를 맺었던 초나라 회왕을 두번이나 갖고 논 사건(제나라와 절교하면 진나라 땅을 떼어주겠다는 장의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분통해하고 장의를 잡았다가 다시 풀어준 일)으로 진나라를 위해서 두 나라를 이간질 시켜서 초와 진이 통혼관계(회왕과 혜문왕이 서로의 딸을 시집보냄)를 맺어 동맹을 하게한다. 하지만 이때 제민왕이 그사이 회왕이 진과 붙었다고 열받아 회왕을 치니 그는 겁먹고 화친차 세자 횡(초경양왕)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낸다.

이에 이번에는 진소양왕이 분통해하며 초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초회왕을 사로잡기 위해서 뺏앗은 땅을 돌려준다고 꼬득여 대장 백기와 몽오를 출전시켜 진나라 함양땅으로 오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초나라 대신 굴원과 소저는 극구 만류했지만.. 가야된다는 근상과 공자 난을 데리고 적지로 들어갔으니 바로 함양땅에 볼모로 잡히고 만다. 이때 초나라에서는 왕위가 비었다해서 곧바로 제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는 세자횡을 데려와 앉히니 그가 바로 초경양왕이다.

암튼, 초회왕이 이렇게 제와 진에 굴욕을 당하며 볼모 생활중 도망치다 다시 잡혀와 분통해하며 피를 한말이나 쏟고 죽었다 한다. 이는 예전 춘추말 진(晉)과 초가 동맹하던 시기에 두곳에 붙을려던 정나라의 정간공을 보는듯.. 정말 안습이라는..ㅎ

하지만 이런 초회왕이 타국에서 객사를 하자 충신이었던 대부 굴원(屈原)은 초경양왕의 근신이던 공자 난과 근상 등의 참소로 삭탈관직당하고.. 고향땅으로 내려가 종묘사직을 달래다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만다. 그가 바로 초나라의 대신이자 애국시인으로 이름은 굴평(屈平)이고 자는 원으로.. 회왕과 경양왕 2대에 결처 봉직하면서 주로 회왕을 섬겨 좌도(左徒)의 중책을 맡아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했으며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서 ..『시경(詩經』과 함께 중국 고대의 2대 시가집이라고 하는 『초사(楚辭)』의 저자(시사로도 병침됨)이기도 하다.

그는 제와 동맹해서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였으나.. 연횡파인 진나라의 장의와 내통한 정적 공자 난과 간신 근상과 왕의 애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회왕이 타국에서 객사하자 초나라의 국세가 기울어가고 조정에는 간신들만 득세하는 상황을 한탄하고 슬퍼하다가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다. 이런 그의 충절을 기려 후세에 5월 5일 멱라수에서는 경도희(競渡戱 :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주, 누가 굴원의 시체를 빨리 건져오나 내기하는 의미)는 행사와 제사를 지낸다고 하니.. 염옹이 충렬왕(굴원의 시호)묘를 참배하고 나서 지은 시가 있다.

사당은 강가에 우뚝 섰는데
충렬왕에게 바치는 향불이 그칠 때가 없더라.
그후 간신들의 뼈는 어디서 썩었는지 모르지만
백성들은 해마다 그날이 되면 배를 타고 충신을 조상하는도다.

이렇게 장의의 세치혀는 얼빠진 초회왕을 갖고 놀고 충신까지 죽이며 초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합종의 소진보다 더 간교하고 뛰어나서 진나라를 중심으로 6국이 그때그때 따라 동맹관계를 맺게 해서.. 지난날 소진이 이루었던 육국의 합종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와중에 연횡정책의 중심에 서있었던 진혜문왕이 죽고 세자 탕이 계승하니 그가 바로 진무왕(이 왕은 용사 임비와 맹분을 데리고 주나라에 가서 용력을 자랑차.. 구정(구룡신정)을 드는 차력시범을 보이다가 놓쳐서 발목이 찍혀 병사하고 만다..ㅎ

다음 권좌는 위에서 애기한 초회왕을 볼모로 잡은 무왕의 서동생 진소양왕)이다.
 암튼, 진무왕이 저렇게 죽기전 권세와 대신들의 반발의 위협을 느낀 장의는 스스로 실각함을 비치며.. 때마침 제민왕 침입의 눈을 돌린다며 위나라 애왕에게 출분해 정승으로 지내다 1년뒤 병사하고 마니.. 소진의 최후와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종국엔 장의의 연횡책은 이렇게 진을 중심으로 했기에.. 성격상 합종보다 훨씬 더 안정성과 효율성을 지니며 진나라 전국통일의 기본적인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 소진의 죽음과 초회왕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읊은 시가 있으니 이렇다.

소진은 원래 주나라 사람으로
귀곡 선생 밑에서 공부했도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산을 내려온 후에도
문을 닫고 '태공음부편'을 열심히 연구했도다.
드디어 그는 육국을 합종하고 진나라와 분리시켜
한 몸으로 여섯 나라의 정승이 되었도다.
그러나 충절로 일생을 마치지 못하고
만년엔 연나라와 제나라로 돌아다니며 지조 없이 굴었도다.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서 반목무상했기 때문에
한때는 초나라 옥에 갇혔다가 귀빈 대접을 받았도다.
우습구나! 초회왕은 나무로 만든 등신이었던가
충신의 말은 듣지 않고 아첨하는 자의 말만 들었도다.

http://mlkangho.egloos.com/3648097 : 귀곡선생의 수제자들 - 유세가 소진과 장의 정리..





덧글

  • SKY樂 2009/04/22 19:10 # 답글

    전국시대의 합종연횡의 이야기는외교사에서도 흥미진진한 점이 아주 많죠. 각국의 balance of power를 위한 머리싸움의 중심에는 초강국으로 부상한 진나라가 있었는데 따지고보면 소진의 합종책이 상당히 세련된 외교정책임에도 진나라에 대한 각제후국들이 느끼는 온도차가 달랐던 것이 안타까운 결과로 나타났지않나 싶습니다. 여느 신흥 강대국들의 고민과 마찬가지로 새로이 패권을 가져가게된 진나라로써도 다른 제후국들의 견제가 가장 걱정이었을텐데, 연횡책을 통한 제후국들의 분열이 도리어 진의 전국통일을 가능케 한 밑거름이 되었던거죠. 여러가지면에서 우리나라가 배울 점이 많은 古史가 아닌가 싶네요.
  • 엠엘강호 2009/04/22 19:33 #

    맞습니다. 합종연횡 이 고사만으로도 전국시대를 다 표현할수 있듯이.. 당시 제후국들의 패권다툼이 얼마나 치열했음을 알 수 있는 지표죠.. 진(秦)의 강성함이 다른 제후국들의 창과 방패와 같은 합종과 연횡을 불러왔지만.. 소진의 합종책은 당시 각 제후국의 이해 관계와 국내외 급변화 속에서 큰 성과를 거둘수가 없었으니.. 하지만 연횡책은 진을 중심으로 각 제후국들이 사정에 따라 동맹을 수시로 변화 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었기에 메리트가 충분했고.. 장의의 교활한 육국 휘젓기 전략도 한몫 했으니.. 암튼.. 진이 상앙변법을 통한 부국강병의 기틀 마련이 이런 결과를 낳은것이 아닌가 싶습니다..ㅎ
  • 에드워디안 2010/04/20 17:49 # 답글

    결국 경양왕의 친진(親秦)정책에도 불구하고 백기(白起)가 대군을 이끌고 수공으로 영도(郢都, 호북성 강릉현)를 함락시키는 바람에(BC. 278), 초나라 조정은 멀리 진성(陳城, 하남성 회양현)으로 천도해야 했지요. 진나라군대에 쫓겨 도망가는 경양왕이 뒤늦게 후회했을지도... 영도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한 굴원이 멱라수에 투신한 거라 합니다.
  • 엠엘강호 2010/04/20 20:18 #

    사실.. 아버지 초회왕이 진(秦)에게 캐굴욕당하며 죽은 후에 이미 초나라의 기세는 기울었죠.. 경양왕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말이죠.. 그러니.. 대부 굴원이 그렇게 만세지탄을 외치며 투신할만도 합니다. 그가 남긴건 고대 시가집만이 전해질뿐...
  • 에드워디안 2010/04/20 22:23 #

    그래도 영도가 함락된 지 2년후에 경양왕이 10여만대군을 재정비해 진군(秦軍)을 격파, 장강 중류 일대의 15개읍을 탈환해 진나라의 동진(東進)을 막았고 다시 4년후엔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연나라를 공격한 걸 보면, 초나라의 저력이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경양왕이 제대로 국정을 다스렸다면, 적어도 수도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진 않았을 것 같네요.

    영도가 함락되기 이전, 경양왕과 귀족들을 비롯한 초나라 지배층은 국정을 돌보지 않고 주색에 몰두했다 합니다. 이것을 걱정한 대신 장신(莊辛)이라는 자가 경양왕에게 경고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화를 내며 듣지 않았고 장신은 조나라로 망명했죠. 그로부터 불과 다섯달 후 진군이 영도로 쳐들어오자 경양왕은 다시 장신을 불러와 계책을 물었는데, 장신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토끼를 발견하고 나서 사냥개를 생각해도 늦지 않으며, 양이 도망간 후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습니다.' 여기서 망양보뢰(亡羊補牢)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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